생방송 인기 DJ 유한권 씨“나이가 먹으니 단어가 자꾸 입에서만 맴돌고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처음에는 ‘아이고 큰일 났다, 방송 망했구나’ 싶었는데 계속 생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저만의 레퍼토리도 생겼습니다. 이제는 방송 중에 할 말이 없으면 ‘잠시 음악 듣고 가겠습니다’라며 능청스럽게 노래를 틀 정도로 프로가 다 됐죠.”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 유한권(80) 씨는 인기 DJ로 변신한다. 유 씨는 해피미디어단의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 진행을 맡고 있다. 격주로 음악 방송과 게스트 초대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유 씨의 입담은 강남구 내에서도 유명하다. “DJ는 발성과 표정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청취자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항상 생각하면서 진행을 해야 해요.”
지금은 라디오 DJ로 유명하지만 유 씨는 원래 노인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스타 강사’ 출신이다. 무역업을 하던 유 씨는 13년 전 은퇴했다. “젊었을 때 무역업을 하며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는데 은퇴하고 나니 영 지루하더라고요. 마침 ‘복지센터나 다녀보라’는 친구의 추천을 받고 서울노인복지센터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노인복지센터 중 가장 큰 곳이라고 하길래 무작정 다녔죠.”
얼마 되지 않아 유 씨에게 입담을 펼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갑자기 복지센터 직원이 저를 애타게 찾더군요. 복지센터에서 기초 생활 영어 강좌를 진행하던 선생님이 사정상 갑자기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나보고 남은 3개월만이라도 영어 수업을 맡아줄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죠. 살면서 단 한 번도 선생님 노릇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직원이 정 그러면 ‘옛날에 해외 다니시면서 봤던 것들이나 말씀해달라’고 사정하더군요. ‘옛날얘기나 하겠다’고 시작한 수업이 그야말로 히트를 쳤습니다.”
수업을 넘겨받을 당시 20명이었던 수강생은 유 씨의 입담에 힘입어 단 3개월 만에 120명까지 늘어났다.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2층 강당을 터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죠. 영어는 무조건 쉽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저만의 지론이었습니다. 어려운 문법을 질문하는 분이 계시면 ‘선생님께서는 기초반에 계실 분이 아니니까 영어 전문 학원으로 가시라’며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죠.”
유 씨가 쉽고 재미있는 수업으로 노인센터에서 유명인사가 되자 화려한 입담을 눈여겨본 해피미디어단이 그를 영입해 라디오 방송 마이크를 잡게 했다.
“올해 처음 보이는 라디오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낯설던 스튜디오가 이제는 마치 제집같이 편안한 공간이 됐습니다. 가끔 말을 더듬을 때가 있지만, 청취자들도 다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해해주셔서 늘 감사하죠. 요즘에는 연극배우에도 도전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체질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제 스튜디오에 게스트로 모시고 싶어요.”
이희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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